
[에세이] 취향, 좋아한다는 고백 #1
디즈니 영화를 좋아한다. 그 중 하나를 꼽으라면 '미녀와 야수'. 미녀로 상징되는 여성과 야수로 상징되는 남성의 사랑이야기는 아주 오래되고 진부하기까지 한 플롯이다. 우리에게 평강공주와 바보온달의 이야기가 있듯 현실의 제약을 넘어서는 여성의 사랑과 그로 인한 남성의 변화는 동양과 서양의 문화적 차이를 쉽게 넘어 아주 오랫동안 전해왔다.
속된 말로 요즘 시대에 맞지 않는 스토리를 나는 왜 좋아하는 걸까. 내가 날 향해 던진 질문이지만 여전히 시원히 대답치 못하겠다. 하지만 미루어 짐작해보건데 어른의 언저리에 위치한 내가 지난 시절의 감동을 아직 잊지 못하는 건 당시에 이해하지 못한 몇 가지의 장면들 때문이겠다.
1) 은색의 유리병 안에서 한 잎씩 떨어지는 장미꽃
차가워보이고, 너무 외로워보였던 유리병 안에서 홀로 생명을 다해가는 장미의 모습은 어린 시절에 큰 흔적을 남겼다. 생명력의 절정일 때 가장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는 꽃의 운명과는 맞지 않는 모습. 어색했고 슬펐다. 내내 보지 못했던 생명의 모습이랄까.
소멸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 채 점점 색이 바래지는 꽃의 모습이 의아했고, 미녀와 야수의 사랑이 기쁘기보단 시들었던 꽃의 색이 화사히 돌아오는 것이 더 기뻤던터다.
죽음을 알지 못했던 어린 생명의 순수한 떨림이 미녀와 야수를 통해 공명한다
2) 진실히 사랑할 사람을 야수. 애써 찾은 사랑을 떠나 보내는 야수. 그렇게 죽음을 맞이함에도 평안해보이는 얼굴.
사랑하기에 떠난다는 말은 아직도 쉽지 않는 말이다. 진실한 사랑이 찾아오지 않아서일까. 여지껏 누굴 진실되게 사랑해 본 적이 없어서일까.
벨을 떠나보내며 끝이 보이는 장미와 함께 앉은 야수의 모습은 경험의 시간이 한 켠씩 쌓일수록 다르게 보인다. 고통스러워 보였던 야수가 이젠 심지어 편안해 보이기까지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내 손에서 놓을 때의 고통보다, 사랑하는 이가 그 나름의 삶을 선택해나갈때의 기쁨이 더 커질 때. 나 또한 사람의 단계가 성숙해감을 느낀다.
갑자기 미녀와야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오늘이 사랑하는 이에게 장미를 건네주는 로즈데이라서다. 머지않아 시들게 될 장미를 선물 한다는데엔 언젠가 소멸하게 될 오늘의 감정